한정식

한국, 1937-2022

한정식은 리얼리즘 사진이 주를 이루던 한국 사진사에서 한국의 미와 동양의 철학을 담은 형식주의 사진을 발전시킨 사진작가이자 이론가, 교육자이다. 작가에게 사진은 연구할 이론적 대상인 동시에 자신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실현시켜주는 매체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그가 주로 다루는 소재는 자연 대상이며, 사진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자연과 자아의 조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1970년대에 작업한 ‘나무(Trunk)’ 연작에서는 ‘사진적 추상’을 통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사진에서 나무의 형태는 때로는 인간이나 동물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며, 신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연작에서 드러나는 사진적 추상은 그 자체로 나무인 동시에 다른 대상과 감정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적고 있다. “사진의 추상화는 사물 벗어나기를 통해 이룰 수 있다. 구체적 사물 없이는 찍히지 않는 사진이 어떻게 사물을 벗어날 수 있을까? 사물을 찍되, 사물이 느껴지지 않고, 작가가 먼저 보이는 사진, 사물의 형태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다가오는 사진이 이루어질 때 사진은 사물을 벗어난 것이 된다. 사물이 제1의적 의미에서 벗어나 제2, 제3의 의미를 창출할 때, 의미도 형상도 벗어난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때 사진적 추상은 이루어진다.” 1980년대에 제작한 ‘발(Physical Landscape)’ 연작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로 이 둘의 융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촬영된 발들은 신체의 모습을 넘어 자연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문 제목 그대로 ‘신체적(Physical)’ 풍경을 보여준다. 나아가 어떤 이미지에서 발은 모래나 물과 뒤섞여 나타나기도 하는데, 발은 신체부위 중 자연과 ‘물리적으로’ 관계를 맺는 부위이다. 따라서 발을 통해 인간은 자연으로 연결되고 자연은 인간에게 이어진다. 이 연작의 영문 제목은 이런 의미에서 ‘물리적(Physical)’ 풍경이라고도 볼 수 있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진행해온 ‘고요(Koyo: Serenity)’ 연작은 작가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대상의 형태를 넘어 존재 그 자체를 탐구한다. 작가는 적고 있다. “존재는 존재할 뿐 이유가 없다. 묵묵한 바위가 까닭이 있어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다.” 그리고 이 시간을 넘어선 존재는 연작의 제목이기도 한 ‘고요’ 개념으로 이어진다. “존재는 고요하다. … ‘고요’는 내 이름이다.” 이처럼 절제된 프레임에 담긴 고요한 자연 대상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촬영하는 작가와, 더불어 그 사진을 보는 관객들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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